독일군의 전격전 제3회

 

<벨기에 돌파전: 영불연합군 주력 유인용 조공(助攻) 루트>

 

독일은 스칸디나비아전이 마무리지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면 연합국의 이 지역 영향력 행사를 일단 저지했다 보고,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404월 말에 들어서자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전개했다.

독일군이 실행한 서부전선 대공세 루트. photo 김재민
독일군이 실행한 서부전선 대공세 루트. photo 김재민

1차대전 때 독일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폰 쉴리펜이 입안한 이 지역 공략계획(전쟁발발 시 독일이 벨기에를 전광석화처럼 관통해 북프랑스를 낫질하듯 공격함)처럼 연합국 측과 독일 측 모두가 이 계획을 염두에 둔 서로 간의 공격과 방어 전략에 대해 약간의 변주는 있을지언정 전체 흐름은 대체로 그리 갈 것으로 양자 모두 믿고 있었다.

1차대전 때 입안된 슐리펜 계획의 개념도. photo 김재민
1차대전 때 입안된 슐리펜 계획의 개념도. photo 김재민

독일 측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초전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대를 당혹케 하여 기선을 잡으려면 그 어떤 변칙적인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도박 같은 모험공격을 결코 하지 않으려는 보수적 성향의 독일군 총지휘부 엘리트 최고사령관들은 이러한 변칙전략에 완강히 거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벨기에 전선 돌파)

 

영불연합군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면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를 통과해 올 것이라 확신하고, 영불의 정예사단들을 벨기에 영토로 투입해서 기다렸다.

 

’405/10일 독일이 예상대로 벨기에와 네델란드에 낙하산병 공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침공을 개시하자 60만의 벨기에군은 1차대전 때 독일군에 나라가 정복당해 거칠게 대우받은 원한으로 초기에 예상외 완강하게 항전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는 프랑스군과는 협력이 잘 되지 않은 채 곧 고립되어 주요 전략적 요충지들(에망에마엘 요새, 알베르 운하)에서 각개 격파 당하고 말았다. 결국 5/28일 벨기에군은 항복하고, 항복 반대파는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웠다.

 

(네덜란드 항복)

 

히틀러는 초기에 네덜란드를 침공대상에서 제외했으나 영불연합군에 벨기에 남부를 우회하는 A집단군의 주공 의도를 기만하고, B집단군이 주공임을 확신시켜 영불군 방어병력을 좀 더 분산시키기 위해 선택했다.

 

그 밖에 공군장관 헤어만 괴링도 영국 공격을 위한 전투비행기지가 필요하다며 네덜란드의 접수를 종용했고, 독일 공업의 심장부인 루어(Ruhr) 지역의 안전을 위한 완충지로서의 역할도 네덜란드 침공 주장을 정당화했다.

 

(네덜란드전 진행 경과)

 

1차대전 때 독일의 지배를 받아본 벨기에와는 달리 네덜란드인의 항전의지와 국방력 수준(30만 병력, 150여 대의 항공기)은 이웃국가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다.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덴 하그(헤이그)의 위치도 photo 김재민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덴 하그(헤이그)의 위치도 photo 김재민
독일군 공습으로 대파된 로테르담 시가지. photo 김재민
독일군 공습으로 대파된 로테르담 시가지. photo 김재민

독일은 침공 초기 네덜란드 정부가 곧바로 비저항 선언을 하지 않고 항전 의도를 보이자, 루프트봐페(독일 공군)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출격하여 하루 만에 네덜란드 공군기를 절반이나 파괴시키고, 시위용으로 5/14일 로테르담을 30여 분간 맹폭함으로써 시가지를 전소시키고 사망자만 1000명 이상 발생시키자 네덜란드 정부는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저항의지를 지닌 빌헬미나 여왕은 하루 이틀 더 대독 항전을 불사했으나 영국정부가 보내준 전선에 옮겨 타고 런던으로 망명해 네덜란드 국민의 레지스탕스전을 독려했다.

 

(북프랑스 돌파를 위한 독일 신군부의 새로운 주공 루트 채택)

 

이 글 앞부분에서 1차대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독일군의 주공이 벨기에를 관통한 뒤 북쪽에서 하향 우회해 북프랑스를 치겠다는 작전은 연합국도 알고 있었고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최고 수뇌부 역시 그 수밖에는 없을 것이라고 당연시했다.

독일군 총지휘부의 기본 공격도 photo 김재민
독일군 총지휘부의 기본 공격도 photo 김재민

독일이 독불 접경의 마지노선을 돌파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 북서부에서 남으로의 주공격로가 불가피하다는 데 프랑스와 초기 독일 군부는 생각이 일치했다. 이 경우 30만의 영국군이 포함된 최정예 프랑스 1집단군(150)은 독일군이 남하하기 전에 벨기에령 다일-브레다 강 방어선까지 먼저 진공해 독일군 주공을 격파하려는 역공전략을 갖고 있었다.

 

독일 입장에서 기존 주공 루트라면 1차대전에서처럼 교착상태의 장기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이 작전의 전개에 히틀러는 불만이 컸다. 그 당시 끔찍한 참호전에서 부상까지 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이때 에리히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같은 기갑군에 의한 전격전을 신봉하는 모험주의 성향의 신군부가 새로운 전략개념의 주공 루트를 제안하자 히틀러는 바로 매료되어 전격 수용했다.

아르덴 삼림 돌파 후의 연합군 섬멸 공격도 photo 김재민
아르덴 삼림 돌파 후의 연합군 섬멸 공격도 photo 김재민

만슈타인 등의 제안은 연합군이 대규모 기갑부대의 통과가 불가하다 여기는 울창한 나무숲들로 우거진 아르덴 삼림을 연합군 사령부 수뇌들의 허를 찔러 집중된 기갑집단으로 최대한 신속히 돌파하여 최고의 전진속도로 영불해협까지 진군해 벨기에령에 있던 연합군을 포위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위험변수도 만만찮은 도박적인 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프로이센 시절부터 유서 깊은 정통파 군사명문 집안 출신이었던 브라우히치 육군총사령관과 할더 총참모장 같은 이들은 삼림 속에서 보병의 엄호도 없이 좁은 길로 진격하는 기갑군이 연합군의 측면공격이나 항공기 공격에 노출된다면 바로 끝장이라며 이 작전에 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군사전문 엘리트 의식에 일련의 열등감과 적개심을 가진 상병 출신 히틀러에게는 만슈타인류()의 비정통 독일육사 장교들의 리스크는 있어도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전략이 더 구미에 맞았다.

아르덴 삼림 속을 통과하는 독일군 전차 부대. photo 김재민
아르덴 삼림 속을 통과하는 독일군 전차 부대. photo 김재민

그리하여 만슈타인의 안대로 원래 조공(助攻)의 임무를 부여받은 룬트슈테트 원수의 A집단군은 이제 주공의 역할로 바뀌며 연합군의 허를 찌르는 기갑집단들의 아르덴 삼림 돌파를 시도한 지 사흘 만인 5/13일에 해내었다. 그 기간 북부에서 B집단군의 선제 위장 공세에 연합군은 철저히 기만당해 만슈타인과 히틀러의 바람대로 아르덴을 돌파하는 독일 주공군에 측면역습도 항공기 공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완벽한 돌파성공이었다.

 

후일 사막의 여우로 유명해진 에어뷘 롬멜도 클라이스트 기갑군 내에서 기갑사단 하나를 사단장으로 지휘하며 아르덴 삼림을 선두권으로 돌파하자마자 미친 듯한 진군속도로 북프랑스 전역을 휩쓸며 가공할 전공을 쌓았다.

 

아르덴 삼림을 통과해 출몰한 독일 주공 부대를 발견한 프랑스 수비군은 혼비백산해 전의를 상실하며 허겁지겁 도주하기에 바빴다. 원래 주공이었던 B집단군의 조공마저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호응하듯 매섭게 몰아치자 바야흐로 연합군 전선의 총붕괴가 임박해지며 독일군의 전격전 신화 역시 여기서 만개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런 도박이 통했으며 향후 프랑스전은 어떻게 전개되어 마무리될 것인가?..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김재민 작가·경영 컨설턴트 photo 김재민

<필자 소개> 김재민은 한국외대 독일어과, 연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나온 뒤 산업경제연구원에 근무하다 도독(渡獨)하여 함부르크대와 함부르크 국방대에서 경영학 디플롬과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경영학 분야에서는 글로벌경영, 전략경영, 마케팅, 창업경영, 인문경영 분야를 주력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이 과정을 현대경제연구원, 현대중공업, 부산 경성대에서 근무하며 수행하다 2020년 퇴임 이후에는 본격적인 프리랜서 글쓰기 작가와 스타트업 기업들의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